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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에 건립된 동양극장은 제주읍성이 있었던 제주시 원도심에 자리잡고 있다. 일반적으로 동문시장으로 부르기도 하고 설계작품에 대한 소개 글에는 동문백화점으로 표기되어 있기도 하다. 상업시설이 두드러지게 강조되는 배경에는 동양극장이 위치한 곳이 시장이기 때문이다. 동양극장이 위치한 장소는 조선시대 방어체계인 3성(邑城)・9진(鎭)・25봉수(烽燧)・38연대(煙臺)중 제주목이 있었던 제주읍성의 중심적인 공간이었다. 동문시장이라는 명칭에서 알수 있듯이 동문에 위치하고 있는 시장의 기능을 하였던 건축물이었다. 해안에 위치한 지형적인 특성상 제주읍성에는 북문이 없고 동문과 서문, 그리고 남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제주의 지질학적 특성으로 인해 해안에 분출되는 용천수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동문과 서문은 성내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삶의 공간이었다. 게다가 제주와 육지로 연결되는 연륙(連陸) 포구는 화북포구와 조천포구 등이 있었는데 모두 동문을 통해 이어지고 있고 가까이 산지천이 가로지르고 있기 때문에 군사측면이나 생활측면, 상업측면에 있어서 동문은 공간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담고 있다.
동문과 서문이 주요 해안마을로 이어지는 연결통로였던 만큼 동문과 서문 주변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었고 각각 동문시장과 서문시장으로 자리 잡으며 1950년대 도시계획에 따라 동문 삼거리(현재 해병대탑이 위치하고 있음)가 조성되고 동문과 서문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확장되었으며, 산지천을 따라 새로운 도로가 개설되면서 현재까지 동문시장의 중요성과 역할을 유지해 오고 있다.
그런데 1954년 3월 13일 대형 화재가 발생해 동문시장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고 주변 주택가에까지 큰 피해를 주는 일이 발생했다. 잡화행상이 휘발유 통 옆에서 라이터를 켜는 순간 불이 붙은 것이다. 마침 강한 바람까지 물어 화재는 순식간에 번졌다고 한다. 산지천 하류에 있는 건물과 남쪽 일주도로 건너 주택가까지 화마의 피해를 입었는데 화재로 인한 피해가 시장뿐만 아니라 주변 일대까지 확대되어 초등학교에 이재민이 분산 수용되는 등 상당히 피해가 있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이재민이 무려 486세대 206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동문시장 화재는 오랫동안 수습이 되지 않다가 196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수습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시장을 지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동문시장이 1963년 들어섰다. 1954년 화재 이후 여러 가지 이유로 재건이 진척되지 않다가 1960년대초 빠르게 진행된 것은 군사혁명정부가 들어섰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도 관련성이 깊다고 할 수 있다, 1962년은 군사혁명정부가 들어선 시기였기에 도지사로 현역 장군을 파견하였다. 그중의 한 사람이 김영관으로 당시 36세 해군 준장이었는데, 혁명정부의 최고 책임자였던 박정희 의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군인 신분이긴 했지만 도지사로 근무하는 동안 많은 업적을 쌓기도 했다. 그는 혁명사업들을 적극 추진했는데, 바로 ‘길의 혁명’ ‘물의 혁명’이다. 그리고 동문시장 재건사업으로 추진된 동양극장도 그의 큰 업적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군사혁명정부는 사회적 분위기를 쇄신하고 지지를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는데 제주도의 숙원사업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것이다. 동양극장이 건축될 당시 군사혁명정부의 관심과 권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흔적이 있는데 주 출입구 위에 설치된 작은 동판이다.

동양극장이 1965년 1월 준공을 축하며 부착한 것이다. 동판에는 “1963년12월1일 작공/1965년1월31일/동문시장주식회사/해군 소장 김영관 기증”이라는 문구가 눈에 띄는데, 그가 제12대 도지사(1961년 5월 24일~1963년 12월 16일)로 재임했던 시기와 겹쳐진다. 그의 재직시절에 인허가 및 착공을 하였으나 준공을 보지못한 체 1963년 도지사직을 물러났기 때문에 준공식에 맞추어 당시 책임자로서 축하의 동판을 기증한 것으로 보인다.
동양극장을 비롯한 동문시장을 포함하면 규모 면에서 당시 여건으로는 상당히 큰 공공건축물이었다. 또 건축의 기능적 측면에서도 시장과 극장을 한 공간에 놓은 제주 최초의 복합문화공간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끌기도 했는데 설계를 맡은 건축가는 김한섭이다. 어떠한 배경에서 건축가 김한섭이 동양극장의 설계를 맡게 되었는지 관련자료를 찾을 수는 없으나 1946년 미군정에 의해 제주도가 전라도에서 분리되기 이전까지 제주도가 전라도의 행정체계 아래에서 활발한 인적, 물적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건축가 김한섭이 전라도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제주출신이었기 때문에 설계를 맡겼을 것으로 추측된다.
건축가 김한섭은 두 차레의 일본 유학을 통해 체계적인 건축교육을 받았고 현장 실무감각을 겸비하고 있었는데 사회적 환경을 적극적으로 수영하고 건축형태와 공간으로서 투영시켜야 한다는 뚜렷한 건축철학이 있었다.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회적 환경에 대해서는 사회의 생산력, 즉 생산기술과 건축물의 목적에 초점을 두고 있다. 건축은 본질적으로 우리들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으로 구축되어지는 결과물이며 그 것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제공할수 있는 생산능력 혹은 환경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기 때문에 건축을 생산하는 작업에 있어서도 그 환경을 면밀히 이해하고 적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가치관에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생산수준에 걸맞는 생산기계의 사용, 구조방식의 적용, 건설노동의 질을 잘 고려해서 건축설계와 시공을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우리나라의 건축수준을 높이는 것이고 또한 지역성 짙은 건축을 생산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건축적 신념과 철학 때문에 김한섭의 건축작품은 매우 과감하고 실험적인 면이 강하게 엿보인다.
건축가 김한섭은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제주에서의 건축활동이 늘어나게 되었고 이를 통해 60-70년대 건축의 불모지라 할 수 있는 제주지역의 개척자적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유행하였던 르 꼬르뷔제의 건축 언어성이 짙은 모더니즘적 작품 성향 속에서 제주적 문화에 바탕을 둔 건축철학과 언어를 가지고 실험적 건축을 시도하였다. 건축가 김한섭의 건축활동은 제주근현대건축의 새로운 장을 개척하였고, 넓게는 서귀포 지역 근대도시공간의 형성과정에도 초석(楚石)을 놓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동시에 모더니즘 건축의 성향속에서 김한섭의 건축에서 나타나는 건축어휘를 외부형태 측면과 내부공간 측면에서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모더니즘 양식의 주류 속에서 건축가 김한섭은 새로운 변화와 실험적 작업이 시도되었다. 모더니즘형식을 탈피하고 지역주의적 성향이 두드러지는 작품들이 나타나게 된다. 전남대학교 농과대학과 동양극장, 남제주군청사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전남대학교 농과대학과 동양극장은 같은 시기에 설계되어 건축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남대학교 농과대학은 동양극장보다는 조금 앞선 시기에 건축되었는데 콘크리트와 조적조 구조에 의한 커튼월을 처리함으로서 완성도가 높아지고 입면에 있어서도 몇 개의 매스로 구성되고 대비되는 질감으로 구성되어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옥상부분의 파도치는 듯한 곡선미의 장식 등은 옥상정원을 연상하게 하는 기법으로 처리되는 등 비교적 완성도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내부 공간 역시 중복도 형식으로 구성되어 상당히 기능적으로 처리되어 있으며 계단의 손잡이와 난간 부분의 처리가 상당히 모던하게 처리되어 있는데 동양극장에서는 이러한 기법과 요소들의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는데 더욱 완성도 높게 적용함으로서 지역주의적 건축의 표현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모더니즘을 탈피하여 은유적인 표현을 통한 장소성의 강조, 그리고 모더니즘적 기능성도 충족하려했던 동양극장은 여러 면에서 실험적인 작품이라 할수 있는데 몇 가지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대성과 역사성이다.
1960년대 당시로서는 제주에서 가장 큰 규모의 건축물로 건축되었다는 점이다. 제주시에서는 동문시장과 서문시장은 오랫동안 시장으로서의 기능과 동문, 서문이라는 공간적 장소성을 간직하고 있었던 전통시장이다. 동문시장의 화재는 사회적 이슈였고 피해재건을 위해 건축된 동양극장의 완공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큰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제주지역사회의 숙원사업이었던 시장재건이 약 14개월만에 현대식 건축물로 재탄생하였는데 동양극장 준공시기인 1963년은 박정희소장 군사쿠테타에 의해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을 시기였고 도지사는 파견직으로 해군소장 김영관은 도지사직을 맡으면서 속도감 있게 재건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시대적 상황과 동양극장이 갖는 건축의 사회적 상징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둘째, 최조의 복합문화시설이다.
당시로서는 계획하기 어려운 시장과 극장의 기능을 복합적으로 구성한 건축이라는 점이다. 극장이라는 문화시설이 흔하지 않았던 1960년대 상황을 고려한다면 극장과 시장을 복합화하여 상업공간과 문화공간을 도심에 둠으로서 현대적인 문화생활공간을 마련하려는 의도를 간접적으로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특히 규모와 기능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건축가 김한섭의 실험적인 시도와 건축적 완성도 등을 엿볼 수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건축물이다.
셋째, 장소성을 들어내는 건축어휘이다.
시장과 점포, 극장은 각각 다른 용도와 기능을 갖고 있는데 이를 외부에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건축물은 크게 4가지 매스로 구성되어 있는데 ①사무실과 점포로 사용되는 긴 사각형의 매스, ②극장출입구 상부 파사드의 파도치는 듯한 모양의 아치로 구성된 매스, ③영화관 내부의 관람 및 영사(映寫)공간으로 사용되는 큰 곡선을 가진 상부 매스, ④삼각형부지의 예각에 세워진 계단실 매스이다.

4개의 매스는 각각 독립적이지만 전체구성으로는 선박과 같은 느낌이다. 영화관 내부의 관람 및 영사(映寫)공간으로 사용되는 큰 곡선을 가진 상부 매스는 마치 선박의 돗대를 연상하게 하고, 삼각형부지의 예각에 세워진 계단실 매스는 선박의 선두(船頭)를 연상하게 하는 점 등이 그러하다. 또한 푸른 바다를 가로지르는 선체 후미의 파도를 연상하게 하는 아치로 구성된 매스도 그러하다. 동양극장이 위치한 곳은 산지천이다. 산지포구를 중심으로 산지천 안쪽 깊이 선박들이 드나들었던 과거의 기억, 장소의 기억을 의식했을 것이다.
또한 사무실과 점포로 사용되는 긴 사각형의 매스와 극장 출입구 상부 파사드의 파도치는 듯한 모양의 아치로 구성된 매스가 이어지는 결합부분에는 아(亞)자형 블록쌓기로 처리하여 매스의 이질적임 결합을 완화시키고 입면의 창호들은 각각매스의 형태와 공간적 성격에 따라 전면유리로 처리하거나 수직적 문설주로 가는 창으로 처리하여 비례감과 입면변화를 갖게 한다. 특히 영화관 객석과 영사관이 있는 큰 곡선의 상부매스는 곡선과 직선으로 구성된 다면체 형식으로 지붕상부의 곡선미를 가지며 매스전체의 비례감을 갖는 설계가 돋보인다. 지역원로건축가 김석윤의 증언에 따르면 줄을 늘어뜨려 곡선의 형태를 찾았다고 한다. 철골구조물과 곡선지붕의 시공도 완성도가 높다. 거의 같은 시기에 계획된 전남대학교 농과대학의 건축개념과 유사성을 찾을 수 있지만 입면의 처리, 형태의 구성과 창호의 처리, 개념적 접근에서는 건축적 완성도가 높다. 특히 형태구성과 개념적 접근에서 볼 때 이전작업에서 볼 수 없었던 장소성에 대한 은유적 표현과 접근이 눈에 띈다.


넷째, 내부공간의 구성이다.
동문시장의 내부공간은 시장과 극장이 분리되어 있고 각각의 독립적인 출입구를 통해 출입하지만 2층 부분은 연결되어 있는 구조이다. 특히 극장내부는 철골조의 대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음향조절을 위해 천정과 벽면부분의 곡면처리, 공기조절을 위한 환기설비 등도 상당히 신경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음향조절 디자인이나 환기덕트 등은 아직도 잘 남아 있는 상태이다.






다섯째, 구조적 측면이다.
동양극장은 형태와 기능적인 측면에서의 특징뿐만 아니라 구조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건축물이다. 극장의 기능상 대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철골구조를 적용하였다. 철골구조는 당시 널리 보급되지 않은 신기술이었다. 1960년대 당시에는 널리 사용하지 않았던 철골구조는 현장에서 리벳을 불에 달구어 지붕으로 전달하면 철골부재의 이음새에 리벳을 끼워 해머로 조립하는 방식이었다. 동양극장에는 철골기둥없이 벽돌조적의 벽체에 웨브web재가 V자로 보강된 철골 트러스 보(Pratt Truss)가 얹혀지는 구조형식이다.

제주도의 경우 1980년대 들어서야 극장과 미술관과 같은 문화공간이 보편화, 대중화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와 1970년대는 시민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주었던 곳이 바로 다방과 극장이 중심적 기능을 하고 있었다.
동양극장이 건립되기 이전에 제주 원도심에는 한국전쟁을 전후해 많은 문학인이 머물렀는데 우울했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었던 곳이 바로 다방이다. 문학인들이 활동하였던 원도심 공간은 크게 1950~1960년대, 1970~1980년대로 구분해 정리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1950년대와 1960년대는 1935년 인간의 애욕과 물욕을 묘사한 <백치 아다다>를 발표했던 계용묵 작가와 관련된 다방이 있을 정도로 문학인에게 중요한 아지트였다. 다방이 오아시스였다면 극장의은 일반인의 안식처였다. 1940년대 초 가설극장으로 시작한 제주극장을 비롯하여 1961년 제일극장이 개관하면서 본격적인 영화의 시대를 열었다. 이후 1963년 동양극장 건립, 1964년 제주시민회관이 건립되면서 더욱 시민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여러 극장이 건립되면서 경쟁이 심해지자 각 극장과 시민회관이 영화의 장르별로 영화를 상영하여 문화공간의 독립적 기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른 극장과는 달리 동양극장은 현대식 시장이 복합된 문화공간이었기 때문에 항상 많은 사람들이 찾는 대표적인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현대사회에서 인터넷을 기반으로 상영되는 다양한 콘텐츠가 범람하고 있지만 당시 극장은 일반시민뿐만 아니라 교육적 목적으로 학생단체관람이 많았기 때문에 각 연령층에서 발생하는 문화적 갈증을 해소하는 장소이자 공동체적 의식을 갖게 하는 집단기억의 공간으로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김태일, 제주건축의 맥, 제주학 총서(1), 제주대학교출판부, 2005
김태일, 제주근대건축산책, 루아크, 2018
김태일, 제주 원도심으로 떠나는 건축기행, 도서출판 각, 2021
주제어
김한섭, 모더니즘, 제주 동양극장, 복합문화공간, 집단기억
김태일 Kim Tae-il
제주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고령자건축이 주전공으로 제주지역의 도시건축 관련 다양한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고령화사회에 대응하기 위한 주택 및 주거환경정비 수법, 도시경관의 유지와 관리,-제주지역 근현대건축물 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오고 있다.
주요 저서로 「고령화사회의 주거공간학」, 「제주도시건축을 이야기하다」, 「제주 속 건축」, 「제주근대건축산책」, 「원도심으로 떠나는 건축기행」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