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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과학기술 분야 종합연구기관인 KIST(Korea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의 출범은 박정희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65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해 존슨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고, 양국은 공동성명을 통해 한국의 공업기술 및 응용과학 연구소 설립을 지원하기로 합의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존슨 대통령의 과학기술고문이었던 도널드 F. 호닉(Donald F. Hornig) 박사 일행이 연구소 설립을 위한 기술 지원 조사차 내한하면서 연구소 설립 계획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되었다. 이후 KIST는 1966년 2월 연구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재단법인 형태로 설립되었으며, 연구소 건물 신축과 우수 연구 인력 확보를 위한 작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연구소가 공식 발족한 지 약 두 달 뒤에는 서울 종로 5가 한일은행 지점 건물에 임시 사무실을 마련해 설립과 관련된 제반 업무를 처리하였다. 이어 자매 연구기관인 백텔(Battelle) 기념연구소와 협력하여 연구원 유치와 산업 실태 조사에 착수하였다. 이후 부지 선정은 백텔 기념연구소가 제시한 기준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여러 후보지를 검토한 끝에 홍릉 임업시험장이 최종 부지로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1966년 10월 기공식이 개최되었고, 연구소 건립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KIST의 건설 및 초기 지원 업무를 담당한 백텔(Battelle) 기념연구소는 연구소 건설계획에 대한 지원과 자문을 위해 미국의 ACMA(Albert C. Martin & Associates)와 용역계약을 체결하였다. 이를 통해 연구 및 행정 기능 수행에 필요한 부지계획, 공간 분할과 배치 결정, 설계도 및 시방서에 대한 타당성 검토 등이 이루어졌다. 이어 ACMA와 공동으로 KIST 장기 종합계획을 수립하였는데, 이 계획은 연구소 건물에 다양성과 통일성을 동시에 부여하는 한편, 단계적인 확장과 발전 가능성을 고려한 것이었다.
연구소의 설계 용역은 한국의 건축가들에게 맡겨졌다. 여러 설계사무소 가운데 엄선된 결과, 연구동을 비롯한 연구시설의 설계는 이광노의 무애건축연구소가 담당하였고, 본관 및 주거시설의 설계는 김수근이 이끄는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가 맡게 되었다. 건축가들은 연구소 측이 제시한 기본 방침에 따라 예비설계안을 작성하였으며, 이후 연구소의 심의와 승인을 거쳐 본 설계에 들어가는 방식으로 작업이 진행되었다.
전체 설계 기간은 약 14개월에 걸쳐 진행되었다.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측에서는 유걸이 본관 설계의 실무를 담당하였고, 황일인은 영빈관 및 독신자 숙소 설계의 실무를 맡았다. 김수근은 한국 최초의 KIST 본관 건물을 설계하면서 개발시대가 요구한 새로운 건축적 이념형을 모색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다양한 공간적·조형적 실험을 시도하였다.
처음 KIST를 위한 부지를 선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된 점은, 자연에 둘러싸여 연구원들에게 최적의 연구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연구원들이 연구에 온전히 집중하기 위해서는 번잡한 도심에서 벗어나 사색에 몰두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KIST 부지는 이러한 조건을 잘 충족하고 있다. 처음 부지를 선정할 당시, 도심에서 불과 4km 이내의 거리에 위치하면서도, 임업시험장의 시험림이 지닌 풍부한 자연환경이 중요한 요소로 고려되었다. 이에 따라 마스터플랜 수립 당시에는 섬세한 지형과 울창한 수림을 최대한 활용하고 보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기울여졌다.

또한 연구시설은 부지 인근까지 확장된 시가지로부터 한 걸음 물러난 위치에 배치되었으며, 주출입구 역시 홍릉 임업시험장을 상당 거리 경유해 접근하도록 계획되었다. 이는 연구소를 일반인의 출입과 외부 환경으로부터 일정 부분 분리·보호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김병현은 KIST의 전체 배치계획을 설명하며 두 가지 핵심 키워드를 제시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변화’이다. 그는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건축가가 두 가지 차원에서 융통성(flexibility)을 확보해야 한다고 보았다. 하나는 건물 내부 공간의 융통성이며, 다른 하나는 전체 배치계획 차원에서의 성장 가능성이다. 또한 각 건물에 융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모듈식 계획 방식을 도입하였다. 이는 건물의 구성 요소와 그 조합을 질서 있게 표준화함으로써, 변화하는 연구 활동과 기능적 요구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자 한 것이었다.
또 다른 키워드는 바로 성장이다. 장래 연구원 수가 증가하면서 연구시설도 확장될 필요가 있고, 이에 따라 마스터플랜에서는 성장의 방향과 패턴을 설정해야만 했다. 그래서 세 가지 축을 설정했다. 연구-실험실군의 남북축, 관리, 공용, 서비스군을 위한 동서축, 그리고 별도의 주거군 축이다. 건축가들은 장래의 성장이 이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도록 했다.

이러한 구상은 1967년에 작성된 마스터플랜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건물 배치에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된 요소는 주출입구의 위치와 지형 조건이었다. 전체 부지는 원래 천장산 기슭에 위치해 숲으로 둘러싸인 환경이었으며, 건물이 들어설 대지는 경사가 완만한 일부 구간을 절토하여 조성한 평탄지였다. 따라서 건물의 배치는 상당 부분 지형적 조건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주요 연구·실험동들은 대체로 남북 축을 따라 나란히 배치되었다. 1967년 마스터플랜에는 총 세 개의 연구 시설과 중앙기계실(Central Utilities Building)이 계획되어 있으며, 연구 시설은 두 개의 연구동(Research Building)과 제작동(Fabrication Building)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세 개의 연구시설 외에도 향후 남북 방향으로 각각 세 개 동이 추가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마스터플랜에 점선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이는 장기적인 성장과 단계적 확장을 전제로 한 계획이었다. 이러한 남북 축의 길게 늘어선 연구동 서측에는 본관 건물이 배치되어 있으며, 연구동과 본관은 육교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주출입로를 따라 진입하면 가장 먼저 본관 앞 광장이 시야에 들어오고, 그 옆으로는 수공간이 계획되어 있었다. 초기 사진 자료를 보면 주 진입로 주변에 연못이 조성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사라진 상태다. 연못을 지나 더 깊숙이 접근하면, 그 뒤로 강한 조형성을 지닌 노출 콘크리트의 본관 건물이 나타난다.
이에 비해 김수근 팀이 설계한 주거시설은 이러한 연구시설 군과는 완전히 분리된 위치에 배치되어 있다. 주거시설은 주변의 숲에 의해 가려져 본관에서는 전혀 인지되지 않도록 계획되었으며, 이는 연구 기능과 생활 기능을 의도적으로 분리하려는 배치 전략으로 해석된다.

1967년 이 건물이 설계될 당시, 김수근은 한국종합기술공사의 부사장직을 맡고 있었으며 그의 사무소 직원들 또한 이 회사에 흡수·통합된 상태였다. KIST 본관 건물의 실질적인 설계 실무는 유걸이 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전에 김수근 사무실에서 제헌회관(현 타워호텔 해피홀)과 원서동 구인회 주택 설계에 참여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초기 설계 단계에서 유걸에게 주어진 과제는 상당히 복합적이었다. 조형적으로는 본관 건물로서의 권위와 상징성을 확보해야 했고, 기능적으로는 단순한 사무 공간을 넘어 다양한 프로그램을 수용해야 했다. 본관에는 컴퓨터실을 비롯해 도서실, 중앙강당, 식당 등 연구 활동을 지원하는 핵심 시설들이 함께 배치될 예정이었으며, 이러한 복합 프로그램을 효율적으로 조직하고 체계화하는 일이 중요한 설계 과제로 작용했다.
설계 과정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평면 모듈을 결정하는 주요 요소들—천장재, 전기기구, 가동 칸막이 등—의 상당수가 미국 규격을 따른 수입 자재였다는 사실이다. 이에 따라 건물의 평면 모듈 역시 자연스럽게 미국식 기준에 맞추어 설정되었다.
현재까지 확인되는 KIST 본관의 계획안은 크게 두 가지이다. 가장 초기안은 다섯 개 동을 병렬로 배치한 형태로, 다양한 설계 기준을 반영한 첫 번째 제안이었다. 이 안은 유걸이 주도적으로 설계해 건축주 측에 제시했으나 최종적으로 채택되지 못하고 폐기되었다. 그는 당시 계획안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루이스 칸의 리차즈 의학연구소를 중요한 참고 사례로 삼았다고 밝힌 바 있다.




루이스 칸은 이 건물에서 여러 개의 ‘방(room)’을 결합해 전체를 구성하고, 각각의 방들은 ‘서번트(servant)’와 ‘서브드(served)’ 영역으로 명확히 구분하였다. 계단실·엘리베이터실·설비 공간 등은 서번트 영역에, 연구 활동이 이루어지는 주요 공간은 서브드 영역에 배치되었다. 유걸은 이러한 명료한 공간 구성 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KIST 본관 설계에도 유사한 개념을 적용하였다. 그 결과 초기안에서는 본관에 요구된 다섯 가지 프로그램을 각각 분리해, 무주 공간으로 이루어진 다섯 개 동에 나누어 배치하는 구성이 핵심 개념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 계획안은 루이스 칸의 작업과는 다른 조형적 특징을 보였다. 칸의 건축에서처럼 서번트 공간을 담은 매스가 수직적으로 두드러지기보다는, 원통형 매스들이 다소 불규칙하게 부착된 형태를 띠었던 것이다. 이는 김수근을 통해 전달된 단게 겐조의 영향으로 해석된다. 당시 단게는 건축 코어와 도시 코어를 연결하는 개념을 발전시키며 원통형 코어를 강조한 조형을 선보이고 있었는데, 이러한 경향이 KIST 본관 초기안에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초기안이 무산된 이후 김수근 팀은 그 한계를 면밀히 검토하였고, 그 결과 두 가지 중요한 결론에 도달했다. 첫째, 다양한 프로그램을 각각 독립된 건물로 분리하는 방식은 기능적 측면에서 비효율적이라는 점이었다. 이에 따라 여러 기능을 하나의 건물로 통합하는 방향이 모색되었다.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다양한 대안이 검토된 끝에, 중앙강당을 중심으로 동일한 네 개의 매스가 톱니처럼 맞물리며 회전하는 배치가 최종안으로 정리되었다. 이 계획에 따라 KIST 본관은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더라도 유사한 입면을 갖도록 설계되었다.
이처럼 큰 변화가 있었음에도 유걸의 초기 계획안에서 제시된 개념은 부분적으로 유지되었다. 즉, 서번트 스페이스와 서브드 스페이스를 구분하려는 사고가 수정안에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결과 KIST 본관에는 계단실·엘리베이터실·덕트실·화장실 등을 포함한 네 개의 서번트 스페이스가 각 모서리에 배치되었으며, 이들은 건물 상부로 돌출되어 강한 수직성을 형성한다.

이 계획안의 평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요소는 1층 중심부에 배치된 중앙강당이다. 이러한 구성은 자칫 폐쇄적인 인상을 줄 수 있으나, 강당이 외기에 직접 면할 필요가 없는 기능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큰 문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중앙에 강당을 배치함으로써 컴퓨터실·식당·회의실 등 주변 기능들을 보다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조직할 수 있었다.
또한 강당 상부를 마당처럼 활용할 수 있다는 점 역시 중요한 장점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김수근은 이 공간에 중정을 조성할 계획을 세웠으며, 이후 한동안 활용되지 않다가 최근 리모델링 과정에서 다시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기능적 문제와 더불어, 본관 건물의 상징성 역시 중요한 설계 과제로 제기되었다. 초기안에서는 주요 파사드가 진입도로가 아니라 연구동을 향하고 있어, 본관으로서의 위상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 계획에 따르면 방문객은 진입도로를 지나 본관 앞 광장에 도달한 뒤에도 건물의 측면을 바라보며 접근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본관 정면에 보다 강한 시각적 위계와 상징성을 부여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높은 관심 속에서 추진되었기 때문에, 설계 과정에서는 건축가와 공사를 담당한 군 인력 사이의 갈등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공사를 총괄한 공병 대령은 청와대의 의중을 내세워 한옥 지붕의 적용을 요구하며, 이를 통해 본관의 기념성을 강조하고자 했다. 이에 대해 김수근은 자신의 건축 언어를 통해 기념성을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는 당시의 권위주의적 정치 환경을 고려할 때 상당히 이례적인 대응이었다.
결과적으로 최종 설계안에는 김수근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되었으며, 초기의 시스템적 구성 위에 기념성과 권위성을 강조한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자유센터에서 보여준 입면 구성과 유사하게, 이 건물에서도 전면의 긴 열주와 상부 매스의 강한 돌출을 통해 본관 건물로서의 상징성을 부각하였다.

KIST 본관의 건축적 가치
KIST 본관은 시대적·문화적·역사적 가치를 복합적으로 담고 있는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시대적 측면에서 보면, 개발독재 시기 군사정권 엘리트들이 지녔던 강한 근대화의 열망이 이 건물에 반영되어 있다. 새로운 연구소의 설립을 통해 경제 발전을 이루고자 했던 당시의 국가적 이상이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계획 방식 속에 구현된 것이다.
문화적 측면에서 KIST 본관은 동시대 서구건축의 영향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르 코르뷔지에, 루이스 칸, 단게 겐조, 폴 루돌프 등 1960년대 서구 건축가들의 건축 언어와 조형 개념이 건물 전반에 깊이 스며 있다. 특히 전후 브루탈리즘 건축의 영향은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다. 르 코르뷔지에의 라 투레트 수도원과 폴 루돌프의 보스턴 시청사에서 나타나는 노출 콘크리트와 벽돌의 거친 질감, 그리고 브리즈 솔레이유(Brise-soleil)의 사용은 KIST 본관의 파사드에서도 특징적으로 확인된다.
마지막으로 KIST 본관은 김수근의 건축 여정 속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건물은 자유센터와 함께 1960년대 김수근 건축의 경향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될 수 있으며, 기능적 합리성과 기념비적 표현을 결합하려 했던 그의 건축적 문제의식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완공 후의 변화들
KIST 본관은 1969년 10월 완공된 이후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건립 당시의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건축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서울시 미래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2017년부터는 본격적인 리모델링이 추진되었다. 설계공모를 통해 건축가 최문규의 안이 선정되었고, 그는 ‘원형의 복원’을 핵심 개념으로 제시하였다.
리모델링 과정에서는 건립 당시의 원형과 이후 변형된 상태를 면밀히 비교·분석하며 복원이 이루어졌다. KIST 본관은 네 면이 동일한 개념으로 설계되어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더라도 유사한 인상을 주도록 계획된 건물이다. 그러나 1990년대에 증축된 식당 건물로 인해 이러한 설계 의도가 상당 부분 훼손된 상태였다. 이에 최문규는 본관의 형태를 보다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작은 스케일의 새로운 식당 건물을 제안하였고, 현재는 그의 계획에 따라 정비가 완료된 상태다.
또한 리모델링 과정에서는 오랫동안 창고처럼 사용되던 중앙강당 상부 공간이 중정으로 재구성되었다. 이는 김수근이 초기 설계 단계에서 구상했던 공간 개념을 복원한 것이기도 하다. 더불어 기존 건물은 단열 성능이 거의 없는 수준이어서 에너지 손실이 컸기 때문에, 벽체와 지붕에 대한 성능 보강도 함께 이루어졌다. 기존 약 3cm 수준이던 단열재는 약 20cm까지 확대되었으며, 옥상정원과 태양광 설비를 도입해 환경 성능 또한 개선하였다.
장기간 사용으로 인한 노후 문제 역시 이번 리모델링 과정에서 함께 해결되었다. 특히 노출 콘크리트 내부 철근의 부식으로 인해 팽창 압력이 발생하고, 그 결과 콘크리트가 탈락하는 현상이 지속적으로 나타났는데, 구조 전문가들의 검토를 거쳐 중성화된 콘크리트를 보수·보강하고 구조적 안정성을 강화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거쳐 KIST 본관 리모델링은 2019년 최종적으로 완료되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김수근, 개발 시대, 건축적 실험, 브루탈리즘
정인하(鄭麟夏) Chung Inha
한양대학교 ERICA 건축학부 교수
1964년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3년 프랑스 파리 제1대학에서 프랑스 현대건축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한양대학교 에리카 건축학부의 건축역사 및 이론 담당 교수로 재직하면서, 동아시아 근현대건축사를 후기구조주의적 관점으로 접근하는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